4卷2冊 : 年譜, 四周雙邊半郭 21 x 16.5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30 x 20 cm.
정묘호란 때 의병인 조준도의 시문집이다. 청송 출신. 아버지는 판서에 추증된 지(址)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습독(習讀)회(恢)의 딸이다. 재종숙인 개(介)에게입양되었으며, 김언 기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중형인 형도(亨道), 종형인 준남(俊男) 등은 의병으로 나갔으나, 노친봉양 때문에 함께 나서지 못한 뜻을시로 남겼다.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에는 고을사람들과함께 창의하고 사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조달하였고, 1629년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의영고주부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이 포위되 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거를 획책하였으나, 다시 화의가 성립됨을 전하여 듣고 그만두었다. 1664(현종 5)년 노인직으로 통정대부, 이어 부호군이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선영 아래 풍수정(風樹亭)을 지어 늙도록 어버이를 사모하니, 이민성(李民成)․이준(李埈) 등 고을선비들이 시를 지어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이 문집은 1900년도 초반,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문집 중 시의 작품들은 일상사에서 느끼는 정감을 표현한 술회시와 퇴계문도의 제현들과 화답하고 창수(唱酬)한 시가 대부분이다. 또한임진왜란의 위기 상황 속에서 느낀 감정을 표현한 작품도 다수 있다.
서(書)중 「여지주정후언굉(與地主鄭侯彦宏)」은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청송 부백(府伯) 정언굉(鄭彦宏)에게 올린 글이다. 출병에 즈음하여 당시 호소사인 장현광과 전란의정세와 의병계획에 관해 논의한 일과 의병장으로서의 역할과 임무, 그에 따른 애로점 등을 서술하고 있다. 「답지주최후산휘(答地主崔侯山輝)」는청송 부백 최산휘(崔山輝)에게 임진․정묘년의 난리를 겪은 후 향촌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제기한 글이다. 특히 그는 별지에 서 구체적으로 향약의 실시, 강학활동, 조적(糶糴)의 관리, 대동법의 실시 등에 대해 해결방안 을 제시하고 있다. 「소회일록(疏會日錄)」은 1608년 5월 22일에서 6월 21일까지 약 한 달간의 기록으로, 이언적의 성균관 문묘종사에 대한경상도 유생들의 결의와 직접 조정에 건의하기가지의 전말을 중요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다. 「정묘록(丁卯錄)」는 정묘호란이 일어났 을 때의 약 한달 간의 기록으로, 자발적인 의병조직과 각 지역 간의 유대, 지방과 중앙의 연락체계등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정축일록(丁丑日錄)」은 1637(인조 15)년정월 1일부터 3월19일까지약 80일간 병자호란의 정황과 참상을 서술한 글이다. 의병장으로추대되어 활동한 행적과 중형 형도(亨道)의 죽음, 최명길로 대표되는 강화조약의 체결, 삼전도의 치욕 등에 대해 적고있다. 이 문집은 17세기 초반 국내외적인 커다란 역사적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전란 문학적인 일기문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